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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스타일의 하이브리드를 시도했던 전작 ′Midnight Vultures′에서 다시금 안온하고 사려깊은 포크 사운드로의 회귀를 꾀한 Beck의 신작. 그로서는 이제 관습적이라 할만한 여러 음악 스타일의 콜라주와, 요란하고 키치적인 이미지의 성찬을 벗어 던진 아티스트로서의 자기선언이라 할 수 있는 본작을 통해 전혀 새로운 그의 일면을 만날 수 있다. Radiohead의 ′O.K. Computer′, Pavement의 ′Terror Twilights′등의 작품을 통해 악기 하나 하나의 음색을 더욱 윤이 나게 뽑아내는 재능을 증명한 Nigel Godrich가 ′Mutation′이후 다시금 Beck과 함께 한 작품으로, 어쿠스틱 포크 사운드와 오케스트레이션 등 고전적인 악기만으로 꾸며나가는 꿈결같은 아름다운 음악에 빠질 수 있다. (알레스뮤직)
*AMG : 9/10
*Rolling Stone : 10/10
*Slant Magazine : 10/10
Return Of The Space-Folky Cowboy
Beck / Sea Change
"백년이 지나도 사랑 받을 수 있는 노래는 내가 고민해야 하는 화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음악은) 동시대를 반영해야 하지만 유행에 그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초월한 고전이 된다는 것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그냥 저절로 되게 놔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퇴보라는 덫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할 것입니다."
1-1 위대한 예술작품은 크게 두 가지의 스타일로 나뉘어 질 수 있다. 하나는 매우 정교하게 짜여진 작품으로 완성되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움을 줄 정도로 많은 장치들이 숨겨져 있어서 그것을 감상하는 일은 그 자체로 유쾌한 지적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상식을 뒤엎는 장치와 반전을 가진 영화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들이 이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다른 하나의 스타일은 매우 자연스러운 내적인 흐름을 지닌 작품들이다. 이런 작품들은 지적인 쾌감을 주는데는 미약할지 몰라도 감성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통해 감동을 전해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같은 영화나 모차르트의 음악이 그렇다. 예술가라면 둘 중 하나의 스타일에 능한 사람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혹시 두 스타일 모두에 능한 사람이 있을까? 물론 있다. 힘들겠지만 당장에 몇 명을 거론할 수 있을 정도이니 아주 희귀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당신이 지금 손에 든 앨범, [Sea Change]의 주인공 벡(Beck)이 그렇지 않은가!
1-2 아직도 14살 이후 변함없는 자신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는 32살의 이 청년은 이미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 아티스트이다. 세계 정복을 위한 첫걸음이 스스로를 낙오자(Loser)로 위장하는 것이었던 이 전략가는 천재급 아티스트이다. 벡이 지금까지 발표한 5장의 앨범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음악은 99퍼센트 노력으로 성취된 것이 아니라 타고난 직관 혹은 센스가 발휘된 작품처럼 보인다. 게다가 그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스타일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는 보기 드문 스타일리스트이다. 벡은 자신의 이름으로 각기 다른 두 종류의 디스코그래피를 구축해가고 있다. ′샘플라덱릭 사운드(Sampladelic Sound)의 총아′로서의 벡은 [Mellow Gold](1993), [Odelay](1996), [Midnite Vultures](1999)로 이어지는 디스코그래피를, ′스페이스 포키 카우보이(Space-Folky Cowboy)′로서의 벡은 [One Foot In The Grave](1994)에서 [Mutations](1998)으로 이어지는 디스코그래피를 구축해오면서 이원화된 솔로 작업을 유지해오고 있다.
2-2 물론 많은 사람들은 ′샘플라덱릭 사운드의 총아′이자 엔터테이너로서의 벡을 좋아한다. 사실 ′스페이스-포키 카우보이′ 벡의 앨범은 그다지 잘 팔리지도 않고 센세이셔널한 반응도 없다. 그럼 당신의 손에 주어진 이 앨범은, 다시 말해 스페이스-포키 카우보이의 음악이 분명해보이는 앨범 [Sea Change]는 잘못 집어든 것일까? 당장 가게로 달려가 차라리 수퍼 싱글 "Novacane"이 수록된 [Odelay]나 프린스 스타일의 멋진 팔세토 창법이 돋보이는 파티 트랙들로 가득한 [Midnite Vultures]로 바꿔오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 것은 아닌지. 그렇지만 아쉽게도 이 라이너노트를 읽고 있는 당신은 음반의 비닐 포장을 벗겼을 테니, 음악적 내용을 빌미로 교환 및 환불은 불가능한 상태이다. 그럼 이제 이판사판으로 이 음반과 씨름해야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제대로 한번 따져보자. 스페이스-포키 카우보이, 벡의 앨범은 샘플라델릭 사운드의 총아, 벡이 만들어낸 앨범보다 덜 매력적인다? 결론은 ′그렇지 않다′이다.
2-3 모두 아는 이야기를 한번 더 하자면, 멋진 샘플들이 사용되면서 도무지 장르를 규정하는 것이 무의미하고 귀찮은 일이 되어버리는 벡의 샘플라델릭 사운드는 정말 매력적이다. ′턴테이블의 지미 헨드릭스′ DJ 섀도우(DJ Shadow)가 샘플라델릭 사운드를 예술적으로 구현해낸 최초의 아티스트였다면 벡은 샘플라델릭 사운드를 팝음악에 이식한 천재 아티스트이다. 다양하고 이질적이기까지한 요소들이 벡의 직관적인 계산에 의해서 믹스되고 매치된 음악은 말 그대로 단순한 혼합물인 퓨전 사운드를 넘어선, 하이브리드(Hybrid) 스타일로 자리매김 되었다. 한마디로 그는 어느 누구의 계보에도 종속될 수 없는 고독한(?) 뮤지션인 동시에 후배들에게는 지우기 힘든 영향력을 드리워준 뮤지션(벡이 없었다면 베타 밴드 Beta Band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이 된 셈이다.
3-1 벡의 샘플라델릭 사운드가 예술적인 의욕, 혹은 생존을 위한 전략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라면 스페이스-포키 카우보이, 벡의 사운드는 뿌리로 환원하려는 본능, 혹은 내면의 울림에 귀기울인 결과로 얻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샘플라델릭 사운드처럼 화려하고 유쾌한 멋은 없지만 대신에 벡의 포크 사운드에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다. 편안하게 평소에 들여다보기 힘든 내면을 흐르는 이런 자연스러운 감정의 움직임을 군더더기 없는 상태의 온전한 음악으로 뽑아낼 수 있는 것을 보면 역시 그는 타고난 스타일리스트이다. 이 앨범 정서의 상당부분의 모티브는, 꽤 잘나가는 패션 디자이너인 여자 친구와의 결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물론 벡은 자신의 앨범을 스스로를 위한 한심한 동정과 연민으로 전락시키는 우는 범하진 않았다. 스스로의 감정에 함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정 기간동안 감정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후, 스튜디오에 들어가려던 찰나에 뜻밖에 9.11 사태가 일어나 시기적으로 다운된 음악을 발표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벡은 1년간 더 발효시키기로 결정한다.
4-1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의 프로듀서로 잘 알려진, 그리고 이미 벡과는 [Mutations]에서 함께 작업한 바 있는 나이젤 고드리치(Nigel Godrich)와 다시 호흡을 맞춘 이 앨범은 역시 [Mutations]의 연장선상에서 한층 발전된 스타일을 들려준다. 물론 포크적인 음악이라지만 스페이스-포키라는 단서가 붙을 만큼 벡의 포크는 엄청난 양의 부유감을 선사해주는 독특한 스타일을 획득하고 있다. 이것은 ′믹스 앤 매치(mix n match)′라는 벡의 음악적 방법론이 샘플라델릭 사운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포크 사운드에도 확장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벡의 포크에는 어쿠스틱 기타로 장식된 벡의 보컬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포크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확장된 음장이 형성되어 있고, 그 공간을 부유해다니는 적지 않은 양의 노이즈와 각종 신서음들을 들을 수 있다. 물론 이것들은 서로 상충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앨범을 듣는 동안에는 감상자의 정면에 마련된 무대에서 어쿠스틱 기타 하나로 노래하는 뮤지션의 모습이 떠오르기보다는, 우주로부터 중계되는 어느 포크 가수의 공연을 관람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4-2 [Odelay]나 [Midnite Vultures]에서 볼 수 있었던 위트 넘치고 때로는 생뚱맞은 벡과는 달리 한참 다운되어 있다가 가까스로 헤어난 모습으로 노래하는 "Golden Age"는 나른하고 쓸쓸하게, 아니 "These day I barely get by. I don′t even try"라고 노래하는 후렴구에서는 슬프게 노래한다. 아마 앨범에서 가장 슬픈 노래로 오프닝을 장식했지만 트랙이 흐를수록 마냥 침잠된 모습을 보여주진 않는다. 심플하고 섬세한 가사와 농익은 현악 세션이 풀어내는 팽팽한 긴장과 나른한 벡의 보컬이 어우러진 "Lonesome Tears"는 앨범의 백미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데 아마 고드리치의 프로듀싱 역량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짐작될 정도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애수어린 톤으로 세공되어 있다. "Lonesome Tears"의 팽팽한 긴장으로부터 해소된 뒤에 흐르는 "Lost Cause"에서는 편안한 목가적인 정경을 풀어준다. 앨범의 후반부에 위치한, 비교적 비트있는 노래라고 할 수 있는 "Sunday Sun"에서는 상심으로 가득했던 "Golden Age"에서 벗어나 삶의 의지를 노래한다. 전체적으로 이처럼 벡이 내면적인 노래를 들려준 적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찰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앨범이다. 물론 그것은 도덕적인 모습을 지닌 경직된 사운드가 아닌, 평범한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자연스러운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샘플라델릭 사운드가 머리와 몸을 감탄하게 만든다면 스페이스-포키 카우보이, 벡의 음악은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앨범의 막바지에 이르면, 아마 당신은 천정이 무너지더라도 헤쳐나올 수 있는 힘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5-1 벡의 말처럼 긍정적으로 이 앨범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가장 슬픈 음악처럼 이 앨범을 즐길 것인지는 감상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 어떤 식으로 이 앨범을 감상하고 해석하든지 적어도 이 앨범이 불편한 감정을 유발할 수 있는 억지스러움이 없는 진솔하고 잘 만들어진 앨범이라는데는 동의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스페이스-포키 카우보이, 벡의 커리어는 지금 막 정점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글 / 이일환(앨범내지발췌)